백석 시인과 자야
백석 시인은 그가 사랑했던 한 여인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삼청각’ 등과 함께 요정정치의 본산 격이었던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 할머니가 그의 연인 가운데 1명이었다. 백석 시인은 1936년 영어교사로 지내던 함흥에서 김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집안의 몰락으로 기생이 되었지만 가곡과 가무에 능하고 일본에서 공부도 한 신여성이었다.
운명적인 만남 끝에 그는 말 그대로 그녀의 영원한 연인이 되었다.
백석 시인은 김 할머니를 ‘자야’라는 애칭으로 부르면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애수 가득한 시를 그녀에게 바치기도 했다.
‘자야’는 서안으로 전쟁하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한 아낙네를 그린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왔다고 한다.
집 안에 한 조각 달
집집마다 다듬이질 소리
가을 바람이 불어 그치지 않으니
이는 모두 옥문관의 정이며
어느 날에나 오랑캐를 평정하고
낭군은 원정에서 돌아오려나
- 자야오가 中에서
실제로 김 할머니는 생전에 ‘김자야’라는 이름으로 회고록을 내 그와의 사랑을 추억했다.
그리고 99년에는 백석 문학상을 제정했다.
그러고도 부족해 김 할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 첫눈 내리는 날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난히 눈의 이미지를 좋아했던 백석 시인을 못 잊어서일까.
그녀에게 바쳐졌다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 한 풍경을 연상시키는,낭만적인 유언이기도 하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백석 시인과의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채 여생을 지낸 자야 할머니는 ‘무소유’를 읽고 감동받아 1000억원대의 대원각 건물과 부지를 법정스님에게 바친다.
그래서 오늘날의 ‘길상사’가 탄생하게 됐다.
권력의 음모와 비천한 탐욕이 판치던 어두운 곳이 구도자들의 성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김 할머니는 또,평생 번 돈 120 억 여원을 과학영재 육성에 써 달라며 한국과학기술원에 헌납하기도 했다
짧은 사랑과 비극적 이별,그리움과 통한의 세월 속에서 숭고한 꽃이 피어난 것이다.



No comments yet.